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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집 이야기] 들판과 계곡이 집으로 들어오다

2020. 12. 4. 00:35Article

이 글은 월간 전원생활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전원생활 2018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온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들판과 계곡, 도시의 골목길, 마당, 정원 등, 화장실에 대한 공공의 약속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세상 모든 곳이 화장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화장실은 가장 오롯한 나만의 장소, 누군가에게는 가장 편안한 곳이다.

 

 

망토로 시작된 화장실

 

시대와 사회에 따라 공동이 공유하고 있는 수치심의 범위는 달라진다. 중세 서양에서 다른 이들이 보거나 말거나 배변을 했던 것은 공간이 분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수치심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유럽의 15~16세기 철학자 에라스무스의 소년들의 예절론에서는 소변이나 대변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무례한 짓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변을 참는 것은 건강에 해롭고, 다만 은밀하게 보는 것이 점잖은 행동이라 말하고 있으며, 대변을 참으라고는 하지 않으면서 왜 방귀는 조심하라고 가르치냐고 꾸짖고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그 시절 소변이나 대변을 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매우 흔했다는 것과 그런 행위가 수치스럽거나 무례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6세기는 문명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초기 단계였으며, 이 시대에 지위가 더 높거나 같은 사람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로 여겨졌고, 하급자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는 것은 호의의 표시로 여겨졌다. 이후 점차 다른 사람 앞에서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는 것은 무례하다는 인식이 공유되었으나, 절대 왕정 시대 왕의 경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왕이 용변을 볼 때 만나거나 이를 돕는 일은 가장 영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왕의 요강을 관리하는 특권을 얻기 위해 귀족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하고, 대대로 귀족의 자손이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별도의 화장실이 존재하지는 않았고, 많은 공공건물에서 여성들은 여러 겹의 드레스 안에서, 남자들은 기둥과 커튼 뒤에서 볼일을 해결했다. 해자(성 주변의 물길)나 강으로 둘러싸인 성의 경우에는 성에 구멍을 뚫어 오물을 내보냈다. 독일에서는 이 구멍에 대고 볼일을 보다가 적이 구멍으로 찔러 넣은 창에 찔려 사망한 제후도 있었다 한다. 1589년 영국 왕실은 공개적으로 신분 고하와 시간과 관계없이 소변이나 기타 오물로 복도나 옷장을 더럽히지 말라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하이힐이 오물을 밟지 않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요강의 사용이 일반화된 이후로도 대부분 요강을 길에 부어버렸으므로, 시 당국에서 창문에서 요강을 쏟을 때 물 조심이라는 말을 외치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 한다. 길거리에는 화장실 업자가 나타났다. 길을 가다 일이 급할 때, 망토와 양동이를 들고 다니는 길거리 화장실 업자에게 돈을 내고 망토 안에 들어가서 양동이에 볼일을 봤다고 하는데, 화장실을 뜻하는 토일렛(toilet)은 프랑스어의 망토나 천을 뜻하는 toile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1773년 수세식 화장실이 발명되었으나, 19세기 중반 여러 차례 전염병이 유행한 뒤에야 위생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여 현대식 화장실이 정착되었다.

 

 

우리 화장실의 역사

 

농경 문화권, 특히 아시아에서는 분뇨를 경작지에 뿌리는 분양법이 기원전 은나라 시절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농경 문화권에서 용변을 보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서양보다 수치심을 느끼는 수준이 높았다기보다는 분뇨를 모아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 백제의 유적지인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지에서 고대 화장실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왕궁 유적지인 만큼 일반 주민들의 경우와는 달랐겠지만, 몇십 년 전까지 흔했던 재래식 화장실과 비슷한 구조의 공공 화장실이다. 잘 다듬어진 나무막대기로 뒤처리를 하는 것이 조금 독특한 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면, 아래의 오물은 배수로와 연결되어 별도의 장소로 오물이 모이는 구조이다.

 

그러나 보편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오랜 세월 귀족들은 요강을 사용했고, 요강은 신부들의 필수 혼수품 중 하나였다. 왕의 요강은 매화틀로 불리었으며, 매화틀을 관리하는 지밀나인과 뒤처리를 돕는 상궁은 궁 안 나인 중 가장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다. 내의원에서는 지밀나인이 들고 온 왕의 용변을 확인해 건강상태를 점검했다고 한다.

 

요강을 사용하거나 뒷간을 이용하고, 이를 경작에 사용했던 우리나라에서도 도시화가 진행되고 인구가 집중되면서 점차 문제가 발생했다. 1869년 독립신문에는 길갓집 창밖에 오줌과 물을 버리지 못 하게 하고, 어른과 아이가 길가에서 대소변을 보지 못 하게 해야 한다.”는 기사가 있고, 1934년 조선총독부는 거주용 건물 부지 내에 반드시 변소를 설치하라는 계획령도 발동했다. 1930년대 길거리와 개천에는 오물이 넘쳐났고, 도시 인구의 급격한 증가 속도를 도시 시설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도시형 한옥, 일명 집장사 한옥이 대규모로 보급되면서 이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대문간에서 가깝고 수거가 편리하도록 길에 면한 위치에 변소를 두었고, 골목길에서 오물을 수거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1941년 영단주택(문화주택)에서 화장실이 주택 내부로 처음 들어왔고, 1962년 마포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지금과 같은 세면기, 변기, 욕조로 구성된 화장실이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작동하는 화장실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지금처럼 냄새 없이 깨끗한 화장실을 사용하게 된 것은 사회적 인식의 변화뿐 아니라 끊임없는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집의 작동을 돕는 설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난방을 위한 보일러, 주방과 화장실의 급수와 배수, 전기이다. 이 중 전기를 제외한 설비들은 물과 관련이 있고, 가장 많은 물을 사용하고, 오물까지 배출하는 곳이 화장실이다.

 

일반적인 경우, 건축물의 기초시공 때부터 급배수와 하수에 관련된 배관들 위에 콘크리트를 타설하여 배관을 묻어버린다. 그러므로 초기에 정확한 계획과 확실한 시공이 되어 있지 않으면 추후 수정하기가 쉽지 않고 품과 비용이 많이 든다. 기초뿐 아니라 매번 콘크리트 타설 전 배관의 위치와 시공 상태를 잘 살펴야 한다.

 

요즘에는 화장실의 샤워 공간을 제외한 공간은 건식으로 만들고 바닥 난방까지 하는 경우도 많다. 화장실에 물기가 적을수록 더 쾌적하고 관리가 용이하기 때문인데, 그렇다 해서 건식 공간에 방수를 소홀히 하면 추후 하자 발생 가능성이 커진다. 타일을 시공하기 전 반드시 꼼꼼하게 적정 높이까지 방수를 해야 하고, 타일 시공 시에도 배수가 잘되도록 바닥의 경사를 잘 잡아줘야 한다. 양변기 시공 시에도 하수관과 최대한 정확하고 기밀하게 접속될 수 있도록 해야 냄새가 올라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천장에도 반드시 점검구를 설치하여 환풍기 등의 점검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현대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정의했다. 집을 지으며 각종 설비를 계획하고 시공할 때와 살고 있는 집의 무엇인가 잘못 작동되어 어디선가 물이 샐 때, 그 말을 가장 실감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잘 지은 집, 좋은 집이란 모든 것이 문제없이 잘 작동하는 집이다.

 

 

오롯한 개인의 공간, 화장실

 

한때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고, 공공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화장실은 철저한 개인의 공간이다. 누군가에게는 편지를 읽는 공간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독서를 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혼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육아나 노동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화장실의 공간 구성이나 재료, 설비들이 점점 다양해지고 풍부해지는 것은 그러한 공간의 성격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집을 짓거나 고칠 때는 화장실에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잘 작동하고 쾌적한 화장실은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