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4. 01:07ㆍArticle
이 글은 월간 전원생활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전원생활 2019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빈 집이 사회적 문제라는 뉴스가 종종 나온다. 사람이 없는 집은 위험하다. 사람이 살며 돌보지 않으면 집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낡고 허물어져간다.
생존을 위한 장소
인간은 혹독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굴에서 불을 피웠고, 땅을 파고 나무를 세워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인류는 생존을 넘어, 안락하고 살기 좋은 공간을 위한 고민과 고군분투를 계속 해왔다.
환경에 따라 집의 구성과 형태는 다양해진다. 따뜻한 지역에서는 바람이 잘 통하게 공간을 구성하고, 햇볕을 막아주기 위한 처마나 차양을 둔다. 반면 추운 지역에서는 두 겹, 세 겹으로 창을 닫아 집 안의 온기가 최대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고,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서는 가파른 경사 지붕을 두기도 한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는 대체로 여름에 매우 덥고 겨울에 매우 춥다. 이에 맞게 한옥의 처마는 여름의 볕을 가려주고, 맞창은 바람을 통하게 하며, 땅에서 띄워 만든 마루는 여름에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해충을 막아준다. 방을 데우는 전통방식인 온돌과 높지 않은 천장고는 겨울에도 따뜻한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은 냉방과 난방 시스템을 통해 많은 부분을 해결하지만, 할 수 있다면 냉난방 기계의 작동 없이도 살기 좋은 집을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한다. 집 주변의 지형에 따라 바람은 어떻게 통하게 해야 하는지, 향에 따라 빛은 어떻게 막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 끝에 집을 설계하고 짓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우리는 냉난방의 도움 없이는 쾌적하게 살기 힘든 지역에서 살고 있으므로, 기계의 선택에 있어서도 신중해야 한다. 가족의 생활 방식과 공간 사용 패턴에 따라 냉방기기를 어디에 얼마나 둘 것인지 결정하고, 효율과 비용도 살펴야 한다. 난방 기기도 관리가 용이하고 효율이 좋은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 더불어 냉난방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밀한 창호와 좋은 유리, 적절한 창의 계획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정도면 집은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공간으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기와 물도 중요하고, 방수와 내구성도 중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꾸준히 잘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꾸준한 관리가 필수적이다.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때가 되면 목재에 스테인을 발라주고, 겨울이 오기 전 지붕 배수구를 낙엽이 막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고, 여름이든 겨울이든 자주 창을 열어 환기도 해주고, 잘 작동하지 않는 기계가 있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생존을 위한 기계, 집을 작동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아름다운 집
B.C 1세기 로마시대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좋은 건축은 편리함, 강함, 아름다움을 갖추는 것이 요구된다.”라고 했다. 편리함과 강함은 건축의 이유이자 기본 요건이고, 아름다움은 우리가 건축에 원하는 것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공간은 삶을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든다. 하지만 아름다운 집을 위해 비용을 지불하기란 쉽지 않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행복의 건축」에서 “아름다운 건축에는 백신이나 밥 한 그릇이 주는 것과 같은 명명백백한 이점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 우선순위에서 절대 맨 앞에 서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나마 공공 건축은 공공재라 아름다운 건축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갖지만 개인의 집은 그렇지 않다. 보통의 우리들은 집을 위해 인생 최대의 소비를 한다. 한 번에 한 가지 무엇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경우가 없으니 손이 떨리고 조금이라도 아끼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름다운 집이라는 것은 겉보기에 멋지고 화려한 집이 아니다. 내 삶을 위해 조금은 욕심내어 만들고 싶은 나만의 공간, 하나 더 낸 창을 통해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조금 탐이 나 단 예쁜 문고리 같은 것들이 아름다운 집을 만들어낸다. 건축가와 함께 한다면 건축가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가 아름다움을 위해 제안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고 살펴보기를 바란다. 지금 조금 욕심낸 것들이 앞으로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은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라고 했다. 그는 덧붙여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아름다움의 스타일도 다양하다”라고 했다. 나와 내 가족의 공간을 만들어가며, 스스로의 취향과 원하는 삶의 방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 아름다운 집, 행복한 집을 만드는 방법이다.
삶을 담고, 삶을 닮는 집
집이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은 좀 구태의연하다. 어떻게 담을지까지는 고민해보지 않았어도, 우리 모두는 집에서 살아가니 당연한 소리 아니냐는 말이 나올 법하다. 하지만 집은 삶을 담을 뿐 아니라 꿈도 담고, 그러다 보면 집이 그 사람의 삶을 닮아가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집에 이름을 많이 붙였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바람을 담는 것이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도, 심지어 강아지의 이름을 붙일 때도 이 생명이 살아갈 미래에 대한 바람을 담는다. 집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한 꿈과 바람을 담는 일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집뿐 아니라 문, 방, 마루에도 이름을 붙이고 심지어 화단과 연못에도 이름을 붙였다. 도산서당에서 머물던 조그마한 집의 작은 문에는 그윽하고 바르다는 뜻의 ‘유정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곧고 올바른 마음을 가지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늘 거처하던 조그마한 방에는 ‘완락재’라는 이름을 붙여 평생 명상하고 공부함을 즐기겠다는 바람을 담았고, 제자들을 돌보던 마루에는 ‘암서헌’이라는 이름을 붙여 학문에 대한 겸손한 마음을 담았다. 연못과 화단에도 ‘정우당’, ‘절우단’이라는 이름을 붙여 선비로서의 자존감을 지키고자 했다. 이렇게 이름 붙여진 공간들을 드나들면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음주가무를 할 수는 없었으리라. 많은 고민과 바람을 담은 공간은 소박하고 단정하게 세워졌고, 마지막까지 그가 그의 바람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그릇이 되었다.
선비와 같이 올곧은 삶을 위한 집만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정체성을 그대로 나타낸다는 이야기다. 집은 지나온 삶과 현재의 삶을 닮고, 미래의 삶을 모두 담는다. 집의 벽돌 하나, 조명 하나에도 그 사람의 취향과 바람이 들어있다. 집은 바로 그 사람이다.
사람의 집
집은 우리의 모든 순간에 관여한다. 새 식구가 들어오는 순간, 두근거리는 만남과 외로워 우울한 시간에도 문으로, 창으로, 마루로 관여한다. 집의 모든 것들은 삶과 기억에 영향을 미친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그 아래 반짝이는 화분과 포근함, 내 손에 닿는 금속 손잡이의 촉감과 두근거림, 나무 계단을 밟았을 때 내 발에 느껴진 든든한 따스함... 공간은 금세 사라질 수 있는 순간의 감성을 견고하게 만들어 기억하게 해 준다.
지난 1년, 집을 구성하는 여러 재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의 기원이자 필수 요소인 불과 물부터 집을 위해 한 곳에 모인 흙, 나무, 벽돌, 콘크리트, 철과 유리에 대해 썼다. 집을 드나드는 해와 바람, 집을 작동하게 하는 전기와 기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집을 완성하고 집을 집답게 하는 것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집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집을 가면 그 애정이 바로 느껴진다. 그 집이 작은 집이든 큰 집이든, 오래된 집이든 새 집이든, 그런 집에 들어서면 조금은 조심스러워지기도 하고 경외심이 들기도 하고 따스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누구나 나만의 집, 아름다운 집에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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